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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night Express in Seoul

〈서울역〉과 〈달빛궁궐〉

나호원

애니메이션 연구가, 건국대학교 영화.애니메이션학과 강사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에서 실험 애니메이션 제작(MFA)을, 영국 왕립미술대학에서 애니메이션 이론(Mphil)을 공부하였으며, 현재 영국 러프버러대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이론 박사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다. 단편 애니메이션 <공무도하가>(화장지, 1999)와 <플라스틱 트라우마: 나르시스와 오필리아, 두 익사체의 死因에 관한 소견서>(스톱모션, 2004)을 만들었다. 스포츠 서울 신춘문예 만화평론, 키노 신인 영화평론가 공모에 당선되어 만화평론과 영화평론을 하기도 했으며, 키트레이번의 『애니메이션 북』과 올리비에 코트의 『오스카 애니메이션』을 우리말로 옮겼고, 현재 여러 지면에 애니메이션 칼럼과 비평을 쓰고 있다.

좌) 서울역 Seoul Station (2016)/ 우) 달빛궁궐 Lost in the Moonlight (2016)

#01 Trailer – 〈서울역〉 위로 오버랩된 〈달빛궁궐〉

영화 〈부산행〉의 흥행은 애니메이션 〈서울역〉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올렸다. 프리퀄이라는 말은 〈부산행〉을 한 번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것 같았다. 혹은 〈부산행〉에 사족을 붙이는 우려를 한 이도 있었을 테다. 여정의 출발점에 대한 작품이자, 사건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부산행〉과 〈서울역〉은 분리 가능하면서도 여전히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을 지닌다. 라이브 액션과 애니메이션이라는 상반된 형식은 두 작품 사이에서 적절한 긴장감을 형성할 수 있다.

〈서울역〉과 〈달빛궁궐〉이 잠시나마 포개진 것은 〈서울역〉의 시사회 현장에서였다. 무대 인사가 끝난 후, 영화관 불빛이 꺼졌을 때 스크린에는 개봉 예정작들의 트레일러가 선을 보였다. 그 때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 〈달빛궁궐〉이었다. 알게 모르게 터지는 탄식들과 물음표들. 짧은 트레일러는 단지 개봉을 앞둔 작품의 소개와 이에 대한 흥미 유발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관객들을 흔들어 놓았다. 얼마 후 온라인상에서는 〈서울역〉에 대한 반응보다는 〈달빛궁궐〉에 대한 반응이 더 격정적으로 이루어졌다.

서로 공유할 것 없이 극과 극에 대치하는 듯한 두 작품은, 그러나, 짧은 오버랩을 통해 일종의 상관관계를 유추할 힌트를 흘렸다. 15세 하드 고어와 가족 판타지, 현재와 전통이라는 대립 쌍은 좀비와 귀신, 서울, 밤이라는 요소를 나누고 있다. 이 정도면 두 작품을 함께 다루기에 충분하다.

#02 Archive Footage – 돌진하는 기차

기차가 관객을 술렁이게 한 에피소드는 영화의 탄생 설화에서 빼놓을 수 없다. 많은 이가 상식으로 읊어내듯, 영화의 첫 관객들은 라 시오타 la Ciotat역 플랫폼을 향해 (서서히) 진입하는 열차의 영상을 보고는 마치 자신들을 향해 돌진한다고 착각하고는 비명을 지르며 상영관을 빠져나갔다는 전설. 물론 관객의 반응은 과장되게 소개되었고, 역사적 사실과도 동떨어진다. 영화의 공식적 출생일인 1895년 12월 28일, 그랑 카페에서는 〈열차의 도착 L’Arriv e d’un train en gare de La Ciotat〉이 상영되지 않았다. 이 작품은 이듬해 1월에나 만들어져 공개되었다. 누군가에게 활동사진 motion picture 은 갑자기 등장한 놀라움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유행이기도 하였다.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는 이미 1895년 여름부터 사진가협회를 비롯한 일군의 전문가 그룹에게 선보이기 시작하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었다. 당시의 빠리지앵을 비롯한 서구 대도시의 문화 향유층에게 사진 이미지가 움직이는 볼거리는 시네마토그래프가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다양한 형태로 소개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에디슨의 1인 영상 매체인 키네토스코프가 이미 1894년 무렵부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물론 〈열차의 도착〉은 대각선 화면 구도를 통해 열차의 진입을 좀 더 입체적으로 담아내는 시각적 성취를 보여준다. 그리고 배우들의 캐스팅 대신 일반인 승객들의 모습을 기록함으로써, 적어도 라 시오타 역 인근 주민에게 이 작품은 ‘월리를 찾아라’처럼 지인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그래도 ‘기차가 돌진한다’는 쇼크 효과는 영화의 시각적 즐거움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당시부터 작동했나 보다. R. W. 폴의 〈활동사진을 처음 본 촌뜨기 The Countryman’s First Sight of the Animated Pictures〉 (1901)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1900년대 초에 이미 그 아이콘은 조롱거리로 활용되었다.

#03 Archive Footage – 떠도는 귀신

에디슨의 키네토스코프는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래프 보다 먼저 활동사진을 구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네토스코프가 영화의 시원에 오르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환영/영사 기능에 기반한 집단적 감상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혹 키네코스코프를 들여다보던 어떤 이가 움직이는 이미지에 놀라서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하더라도, 그러한 에피소드는 그랑 카페에 모인 관객들의 전설보다는 드라마틱하지 않다. 역사는 집단적 쇼크를 원한다.

사실, 관객 집단이 환영 이미지 projected image에 혼비백산하며 벌벌 떠는 상황은 1895년에 서 약 100년 정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다. 바로 판타스마고리아 phatasmagoria라는 일종의 매직랜턴 상영회에 대한 기록이다. 이미 1600년대 후반부터 매직랜턴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 되어 왔다. 엔터테인먼트 목적으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시청각 매체로 인기가 좋았다. 컴컴한 예배당 안에서 연옥의 이미지를 투영하면서 ‘죄를 지으면 불맛을 볼 것이야~’라고 (겁박을 겸한) 설교를 하는 식으로.

판타스마고리아는 여기에 공간의 특수성을 더 가미한다. 우선 매직랜턴에 바퀴를 달아서 앞뒤로 오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벽이나 스크린 같은 평면이 아니라, 객석을 아우른 공간에 연기를 채우고 그 위에 이미지를 영사하였다. 이로 인해 이미지는 유령처럼 맘껏 공간을 휘젓고 떠다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판타스마고리아 쇼가 주로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 살육극이 펼쳐진 지역의 교회나 방치된 건물에서 펼쳐졌다는 사실이다. 비극이 생생히 남아 있는 곳에서 해골과 유령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는 관객은 참상의 원혼이 되살아났다고 느꼈을 것이다. 2차원 평면에서 재현된 기차의 움직임보다 훨씬 공포스러운 시각적 경험이다. 그리고 요즘 많이들 얘기하는 장소 특화적 예술의 본보기라 할 수 있다.

#04 Archive Footage – 귀신들린 집 Haunted House

영화의 등장은 허공을 떠돌던 귀신, 유령, 혼령의 영사 이미지를 다시 스크린 평면으로 고착시켰다. 판타스마고리아의 바퀴 달린 매직랜턴과는 달리, 영화관의 영사기는 한 곳에 고정되었다 (초기엔 관객 사이에, 그리고는 객석에서 격리된 별도의 영사실 속에). 스크린 위의 이미지가 객석을 덮치지 않는다는 사실은 라 시오타 역으로 들어서는 기차의 영상을 무사히 감상한 생존 경험을 통해서도 입증되었다. 영화 이미지는 결코 관객을 해치지 않는다.

더 이상 허깨비가 공포를 자아내지 않게 되자, 유령은 엔터테인먼트의 소재로 변화하였다. 초기 영화의 트릭 사진술이 어느 정도 시행착오를 거친 후, 1907년 무렵부터 새로운 장르의 영화가 등장하여 인기몰이를 하였다. 바로 애니메이션과 결합한 유령의 탄생이다. 지금은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이나 오브제 애니메이션으로 불릴 법한 기법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인데, 주로 일상의 사물들이 스스로 움직이면서 그 공간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위협하여 쫓아내는 식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국에서는 제임스 스튜어트 블랙턴이, 유럽에서는 세군도 드 쇼몽과 에밀 콜이 이 장르를 만들면서 재미를 봤다.

흥미로운 지점은 생명력을 부여받은 사물들이 한바탕 대소동을 일으키는 이러한 장르가 때로는 ‘귀신들린 집 haunted house’과 같은 제목을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전기 / 자동화된 집’과 같은 제목으로 선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주술적/미신적 요소를 부각하기도 하고 계몽적/ 과학적 요소가 내세우기도 한다. 아마도 어떠한 성향의 관객층을 타깃으로 삼고 있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장르는 ‘공간의 주인은 (잠시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늘 그곳에 있으면서 홀연 깨어나 활동하는) 사물이다’라는 메시지를 우당탕탕 해프닝 속에서 깔아놓고 있다. ‘생명력 없는 대상에 영혼을 불어넣는다’라는 애니메이션의 일반적(그래서 항상 동의할 수만은 없는) 인식과 만나는 지점이다. 영화로서의 애니메이션은 그 출발점에서부터 관객과 주술적 놀이를 하고 있었다.

달빛궁궐 Lost in the Moonlight (2016)

#05 Insert – 서울 지도

〈달빛궁궐〉은 서울을 지도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때 서울은 북악과 목멱이 마주 보고 있는 영역으로 제한된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특별시가 아니라, 창덕궁이 사대문의 중심 구실을 했던 조선 시대 한양을 전면에 내세운다. 북악과 목멱을 주재하는 신들은 과거 속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언제든 깨어난다고 설정한다. 이야기 전개 속에서 사건은 창덕궁을 중심으로 펼쳐지지만, 광화문과 남산 일대가 등장하기도 한다. 혼돈에 빠진 현재의 풍경은 관객에게 과거와 현재,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연결점을 선사할 수 있다.

그런데 북악으로부터 창덕궁과 광화문을 거쳐 목멱/남산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동선을 지도에 표시하다 보면 빠진 곳이 있다. 바로 서울역과 회현/명동 일대이다. 눈치가 빠르다면 이미 간파하였을 테다. 〈달빛궁궐〉에서 비워놓은 곳이 〈서울역〉에서는 주 무대다. 그래서 사대문 중심의 서울 지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달빛궁궐〉과 〈서울역〉을 포개 놓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두 작품은 어째서인지 동선의 접점을 허락하지 않는다, 왜?

#06 Chase Films

서울을 휘젓고 다니는 동선은 도주 경로이다. 도주는 본래 자신의 위치에서 벗어날 때 생긴다. 〈서울역〉에서 혜선은 가출한 상태로 이야기에 등장한다. 혜선은 이미 집을 나왔고, 가출 기간 동안 일했던 업소에서 도망쳤다. 이러한 처지에서 거쳐 갈 수 있는 동선은 북악-창덕궁-광화문-남산을 따를 수 없다. 이는 어디까지나 관광 코스이고, 랜드마크이며, 제도적으로 관리되는 곳이다. 혜선에게 허용된 동선은 싸구려 여관이 있는 뒷골목과 홈리스가 기거하는 서울역 지하도뿐이다.

〈달빛궁궐〉 역시도 자격루의 십이간지 중 ‘쥐’에 해당하는 다람이가 본래의 자리를 박차고 나가면서 모든 사태가 벌어진다. 할당된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시간의 흐름/질서 자체가 흐트러진다. 주인공 여자아이인 현주리도 뮤지컬에서 할당된 자신의 역할과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대의 중심으로 나서는 순간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는다. 현주리에게나 다람이에게나, 이미 주어진 자기 자리는 스스로를 (돋)보이지 않게 하는 위상으로 여겨진다. 인정받으려면(그리고 인정받고자) 벗어나야 했다.

도주극/추격극 chase lm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근간이며, 이를 물려받은 카툰 애니메이션의 기반이기도 했다. 이 때 도주의 원인과 귀결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도주극의 핵심은 좌충우돌의 상황 속에서 일련의 연쇄작용을 통해 눈덩이처럼 사태가 커지는, 일종의 카오스적 벡터값에 있다. 좀비가 왜 등장했는지, 도대체 매화부인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부차적이다. 지도 위의 동선을 얼마만큼 힘차게 질주하는가가 관건이다.

#07 Set

도주극에서 공간은 동선의 궤도이고, 그곳을 차지하는 건물과 풍경은 일종의 배경 세트와도 같다. 〈서울역〉과 〈달빛궁궐〉처럼, 만약 현실 세계의 좌표값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면, 그 공간을 잘 알고 있는 관객에게는 어느 정도의 이동 거리와 속도, 소요 시간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할 수 있다. 반면, 현실의 (서울) 지리를 잘 모르는 관객에게 특정 건물과 지역의 등장은 좌표적 특이성을 지니지 못한다. 다만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충분히 매력적이거나 인상적이라면, 영화는 일종의 시티 투어 영상이 될 수 있다. 이는 많은 (글로벌) 대도시들이 큰 스케일의 영화 제작을 위해 흔쾌히 편의와 인센티브를 제공하면서 촬영을 유치하는 이유이다.

한편으로 영화 속에서 부서지는 도시 풍경은 그 도시가 지닌 파괴적 역동성을 보여주는 징후이거나, 이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견고하여 역동성을 잃어버린 징후이기도 하다. 역동성의 과잉이든, 역동성의 결핍이든, 영화적 스펙터클로 등장하는 파괴된 도시는 질서와 카오스 사이를 오가는 카타르시스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이 순간, 그 지리적 풍경에 익숙한 로컬 관객은 외지의 관광객과 같은 시선으로 (파괴된) 광경을 구경한다. 그것이 도주극이라면 속도의 쾌감은 덤이다.

서울역 Seoul Station (2016)

#08 Genre – 좀비와 낭만주의 판타지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애니메이션은 흔히 ‘생명이 없는 것에 영혼을 불어넣는’ 작업으로 얘기된다. 영혼이나 숨결, 입김 같은 신화적/비의적 수사를 차치하더라도, 오브제에 움직임을 부여한다는 정의를 온전히 따를 수만은 없다. 픽실레이션이나 로토스코핑, 모션 캡처 등과 같은 제작 기법에서
볼 수 있듯, 살아있는 생명체도 애니메이션과 만날 수 있다. 생명체가 애니메이션으로 거듭나기 위해 서는 하나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생명을 거두고 스스로 오브제가 되는 것(혹은 오브제처럼 구는 것). 오브제가 된 생명체가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과 만나면 꽤나 기이해진다. 오브제가 사람인 척하는 것 만큼이나 사람이 (애니메이트되는) 오브제 흉내를 내는 모습도 언캐니 uncanny 한 것이다.

영혼 없는 육신의 움직임은 바로 좀비이다. 픽실레이션의 출발점인 노먼 맥클라렌의〈이웃 Neighbours〉(1952)에 등장하는 두 인물들은 육박전을 치르면서 점점 좀비의 외양과 움직임을 닮아간다. 좀비를 내세운 〈서울역〉과는 대비되게, 〈달빛궁궐〉의 모티브이자 출발점이 된 자격루는 오토마타 automata 라는 자동인형의 메커니즘과 유사하게 작동한다(서양의 오토마타는 기본적으로 시계태엽 장치를 응용하여 제작되었으며, 오토마타 장인 중 많은 수가 시계공이었다). 다람이는 오토마타의 일부분으로 기능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생명체가 되고자 뛰쳐나온다. 낭만주의 시대의 판타지를 따르는 것이다. 일단 좀비와 판타지라는 설정이 제시되고 나면, 이제 두 작품은 각자가 속한 장르의 컨벤션을 따라 진행하면 된다. 감상과 평가의 지점에서라면 각 작품이 얼마만큼 장르에 충실한가, 아니면 장르의 변주를 꾀하는가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09 언캐니와 집

좀비와 귀신 (혹은 정령이라고 순화시켜도 별반 차이는 없다)이 자아내는 언캐니는 각각의 장르로 편입되어 구체적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서울역〉과 〈달빛궁궐〉은 각자의 장르를 따르는 와중에도 공통분모를 함께 지닌다. 바로 ‘집’이다. 〈서울역〉은 집 없는 자들을 따라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가출한 자, 고향을 떠난 자, 홈리스 등등. 현실에서 서울역은 평소에는 각자의 목적지 (집)을 향하는 자들이 이용하는 곳이고, 문을 닫았을 때는 집 없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서울역〉은 문이 닫힌 시간대의 서울역을 담는다. 집 없는 자들의 집.

그렇다면 〈달빛궁궐〉은?  이 작품에서는 자격루를 비롯하여 창덕궁을 이루는 물리적 소재들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창덕궁에서 이루어졌던 사건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 대신, 건물과 사물이 깨어나 활동한다. 따라서 창덕궁은 사물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그저 세트로서의 배경으로 물러선다. 집, 처소로서의 궁궐이 지니는 특성은 사라졌다. ‘만약 자격루가 창덕궁에 없었다면, 굳이 〈달빛궁궐〉이 창덕궁을 간택하였을까’라는 질문도 던질 수 있다. 물론 매화부인이 창덕궁의 정원에 집착한다는 설정을 작품 말미에 환기시키긴 하지만, 여전히 매화부인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목적성 없이 폭주해야 한다면 그것은 좀비의 몫이다.

집은 프로이트가 언캐니라는 개념을 추적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언캐니에 해당하는 독일어 unheimlich 와 연결된다. Heimlich는 집이라는 heim에서 파생되어, “집의 한 부분인”, “친숙한”, “길들여진”, “친근하고 내밀한” 등등의 뜻을 지닌다. 이러한 단어의 부정형태인 unheimlich, 영어로 언캐니는 집에서 벗어난 상태와 맞닿아 있다.

#10 Epilogue – 그래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거리에는 좀비가, 집에는 귀신이 산다. 좀비로부터 도망친 혜선 커플이 (아버지를 가장한) 포주 삼촌 석규와 만난 곳은 모델하우스이다. 모델하우스는 ‘견본주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이상적인 집의 형태를 보여주지만, 결국 집을 흉내 내는 세트에 불과하다. 모델하우스는 실제 거주하는 사람이 없어야 제 기능을 발휘한다. 사람이 살고자 들어선 순간, 모델하우스는 신기루가 되어버린다.

〈달빛궁궐〉은 제작진이 억울함을 호소할 만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이 글은 논란의 지점에 대해 심판을 내릴 의도는 없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센과 치히로의 행방 불명〉은 〈달빛궁궐〉과 〈서울역〉 사이의 간극을 절묘하게 채워주는 위상값을 갖는다. 〈센과 치히로〉에 등장하는 귀신-정령들은 집을 떠나지 못하는 원혼들이다. 이 작품이 단순한 판타지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현실과 맺고 있는 관계 때문일 것이다. 집에 귀신이 들렸다기보다는, 귀신들이 집에 붙잡혀 있는 처지이며, 그 집은 무분별한 신도시 개발과 부동산 거품의 산물이다. 그러니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외양적으로는 〈달빛궁궐〉과 연결될지라도, ‘집’에 대한 접근 태도에서는 오히려 〈서울역〉과 더 가깝게 엮을 수 있다.

#11 추가 Epilogue – 판타지의 적(敵)은 현실?

작품이라는 텍스트는 콘텍스트와 어떻게 만나는가? 장르 영화에서 현실의 요소는 장르의 컨벤션을 통해 우회한다. 그러면서 스멀스멀 현실 속으로 파고 든다. 그런데 현실이라는 콘텍스트가 장르를 압도할 때가 있다. 예컨대, 부조리극이 세상에 대한 풍자와 조롱으로 등장하였지만, 그 생명력은 길지 않았다. 세상이 부조리극이라는 드라마보다 더 이치에서 어긋나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달빛궁궐〉은 〈서울역〉에 비하여 현실과는 거리를 둔 작품이지만, 그 어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글을 쓰는 지금 현재에는 〈서울역〉보다 훨씬 현실과 맞닿고 말았다. 여러 이유로 〈달빛궁궐〉의 감상을 피하였거나 외면했다면, 적어도 2016년 11월 초의 상황에서 이 작품은 꽤나 즐겁게 관객에게 다가갈 것이다. Ost중 하나인 〈옷 갈아입자 (변신송)〉의 한 구절만 인용하겠다. “우리들은 아씨방 일곱 동무 / 오옷, 오옷, 갈아입자 / 예쁜 옷을 지어줄게 / 선녀처럼 아름다운 옷…” (아, 물론 한복의 아름다움을 읊은 노랫말이다!)